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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리뷰씨

조선무속고 이능화

by 캐롤의법칙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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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무속고

이능화 지음/서영대 역주

*이능화 - 조선시대 고종6년(1869) 충북 괴산에서 출생해 1943년에 사망했다. 자는 자현(子賢)이고 호는 간정(侃亭), 상현(尙玄), 무능거사(無能居士)를 두루 썼다. 개화파 이원긍(李源兢)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시대의 변화를 절감하여 전통학문인 유학(儒學)이 아닌 외국어에 매진해 프랑스어·영어·중국어·일본어 등에 통달했다. 1906년에는 한성법어학교 교장으로서 외국어전문가 양성에도 참여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전후로 인생행로를 학문 연구로 바꾼 후 한국의 종교와 민속 연구에 개척적인 업적들을 남겼다. 저술의 상당수가 산일(散逸)되고 현재는『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조선여속사(朝鮮女俗史)』『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등이 한문으로 전해진다.(예스24 참조)

*책소개

한국 무속의 역사와 제도, 의식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무(巫)에 대한 비교연구까지 수행한 것으로, 한국의 무속사와 종교사 그리고 사회문화사 연구의 선구적 업적이자 한국문화의 연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은 고대 이후의 자료를 시대별로 정리했다는 면에서 일차적으로 한국 무속에 대한 자료집의 성격을 가진다. 하지만 자료의 단순한 정리를 넘어, 각종 무속 관련 자료의 신뢰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또한 무속을 배척하던 당대의 지배적인 유교적 가치관에 매몰되기보다 한국의 무속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고증하면서 무속현상의 전체적인 모습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고 있다.(예스24)

*내 별점 ★★★★

 

 

 

 

멀게는 고구려~고려 부터 조선시대 무속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심도있는 내용이라기 보단 그 시대 무속, 무당에 대한 이야기 혹은 민담, 설화 등을 역사서와 자료를 통해

정리해 놓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소개에도 나와 있듯이 한국의 무속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읽기 쉽게 만들어 놓은 책이 흔치 않은 점으로 볼 때,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무엇보다 알면서도 모를듯한 무속의 세계에 대해 흥미있게 읽을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조선시대 무속은 현대처럼 미신이란 인식이 있으면서도 그 속설과 내용에 빠지는가 하면, 무당의 현란한 말솜씨와 재주에 현혹되어 민간의 생활, 나라의 근간도 흔들려 했던 역사적 사실도 전해진다. 유교적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때는 무속을 배척하고 무당의 지위를 박탈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아마도 조선시대 무속, 무당에 대한 인식과 관념들이 현대에까지 이르게 된 건 아닌가 싶다.

그렇다한들, 조선 왕실에서는 신관과 신당을 모시는 정식 국무를 두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아는 기우제를 지내거나 왕의 병이나 기타 재난시 제를 하고 굿을 하기도 했다.

-성수청 : 국무가 소속 된 관청. 소속 무당을 국무당 이라 함. 고려시대 '별례기온도감' 과 비슷.

세종과 성종때는 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무녀를 불러 제를 지냈으나 유생들에 의해 저지 혹은 매질하고 쫓아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는 보통 대비, 중전등 내명부에서 행했다고 한다.

왜 내명부지? 싶은데. 아무래도 무당은 보통 여성(무녀)이라 그랬나 싶음.

어쨌든 무속이란 건 예나 지금이나 명(明)이 있으면 암(暗)이 있듯이 자신의 재주를 이용해 나라를 흔들고 사기치는 사이비들이 판쳤다는 것도 사실이다.

무녀 '돌비' 라는 이름이 역사서에는 꽤 자주 등장하는데(연산군과 중종), 돌비는 다른 무당과 박수들을 데리고 궁에 들어와 제를 지내고 사기를 쳤다고 나와 있다. 또한 외척에 의한(대비, 중전쪽 가문) 무당이 성행했다고도 하니(이는 대부분 향락과 사치, 사기로 이어짐) 사회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유생들과 대치가 심해 신당이 불타는 일도 생겼다고 한다. 이런 일은 왕실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피해가 심각해지니(박수무당은 주로 남성인데, 이들이 부녀자를 희롱하고 사기를 치는 일들도 빈번이 일어남) , 무당들을 아예 관청에 소속시켜 감시하고, 그들을 활인원(오늘날로 다지면 구제기구)에 무보수 봉사를 시켜버려 덕을 쌓으면 세를 감면해주고 어기면 벌을 주도록 했다. 이런 것이 숙종때는 활인서에서도 쫓아내고 도성에 발을 붙이지 못 하게 했다고 한다.

 

 

"옛날부터 받들지 못할 신이 없다"
재앙, 기근이 있을시 어떤 신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의미

 

그렇다고 무당이란 것이 항시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다. 신기를 받은 무당이 억울한 사연이나 마음 아픈 일들을 위로하고 국가에서는 제를 통해 혼란한 민심을 다스릴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은 인간이 어떻게 '쓰이고' '사용하느냐' 에 따른 것이 아닐까.

현대에도 '사이비' 란 존재하고 '종교' 는 사라지지 않을테니. 우리는 여전히 무엇이 진짜고 가짜고를 따지고 판단하지만 사실 그리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나는, 종교든 미신이든 그것이 사회에 혼란을 초래하고 피해를 준다면 굳이 종교라 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가는 피해를 준 단체를 없앨수도, 제약할 수도 없다.(현대 사회가 할 수있는 게 구상권 청구, 법적 소송일 뿐인데 이조차도 제대로 판결 된 경우를 본 적이 없음.) 조선시대에도 피해를 주는 무속인들을 단속하고 쫓아냈지만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깊게 파고들어 있는 것처럼. 아니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신'이란 가치에 대해 지극히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신' '무'라는 것을 객관적이고 사료적인 측면에서 살펴본다면 이보다 재미있는 것이 또 없다.

(이것은 성경책 공부나 그리스.로마 신화와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나는 예수를 믿진 않지만, 성서의 이야기나, 과거의 역사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우므로)

그래서 나는 종교를 정신적 의미보단 역사적 의미로 다가가는 게 좋다고 여긴다. 맹목적 신앙심이 결국엔 피해를 주므로.

 

 

무당을 지칭하는 단어 역시 몇 가지가 존재한다.

자고로 무당은 춤추고, 연기하고, 악기를 다룰 줄도 알았으며, 흥을 돋우는 역할도 해야 했다. 쉽게 굿판을 떠올려 보자. 그들은 굿을 하기 전에 여러가지, 일명 '쇼'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민간에서는 무당을 광대라 부르기도 했다.

광대=배우(그 당시 탈쓰고 연기, 곡예하는 극단 등)가 원래 의미이나, 무당들도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니 일반인 눈에는 광대나 무당이나 똑같이 보였을 터. 이 말이 와전되어 오늘 날 배우(연예인)들이 신기가 있다, 무당이 될 기가 있다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한편으론 조선 후기로 갈수록 무당의 입지가 사라지고 좁아졌을테니, 진짜로 광대가 되는 무속인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무당은 만신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뭐 큰 의미는 없어보인다. 중국의 사료 중 하나에 무당을 만신이라 불러 그렇게 불리었다 정도인 듯. 어차피 같은 의미라는 것. 그런데 얼마전 코미디 프로에서 한 배우가 나와 자신이 무당역을 했다면서 만신이라고 따로 지칭한 걸 보고 둘다 같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드랬지.ㅋ

이 책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사료 중에 '어우야담' 이란 게 있다. 설화집이다.

한국 최초의 야담집이라는데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 다음에는 어우야담을 읽어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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