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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리뷰씨

다른 방식으로 보기 - 존 버거

by 캐롤의법칙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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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방식으로 보기 - 존 버거 / 최민 옮김 (주석포함 총 190페이지) (이미지 -알라딘 이북)

* 존 버거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처음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혀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했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했다. 저서로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예술과 혁명』 『다른 방식으로 보기』 『본다는 것의 의미』 『말하기의 다른 방법』 『센스 오브 사이트』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 『백내장』 『벤투의 스케치북』 『아내의 빈 방』 『사진의 이해』 『스모크』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초상들』 『풍경들』 등이 있고, 소설로 『우리 시대의 화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G』 『A가 X에게』 『킹』, 삼부작 ‘그들의 노동에’ 『끈질긴 땅』 『한때 유로파에서』 『라일락과 깃발』이 있다. (알라딘 작가 소개 발췌)

* 내 별점 - ★★★★★

- 발간된 지 48년이 된 책.(1972년 초판 발행). 50여년 가까이 된 비평 책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많은 예술가, 비평가들에게 교과서 작인 책이라 한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우연찮게 본 누군가의 블로그 발췌 때문이었다. 발췌본은 과거 예술작품과(주로 유화 순수미술) 현대 미디어(TV, 화보 광고)에서 '사용' 되는 여성의 이미지가 '남성들의' 방식으로 평가되어 왔다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여성작가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니 흥미가 돋아 읽게 되었다. 또한 여성주의 적 시각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꼬아보기' 가 맘에 들었다.

총 6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과거 순수미술의 기본이었던 유화 작품들의 시장과 소비계층, 특히 귀족들의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시작으로 현대로 들어오면서 다변화 된 예술 시장의 변화와 광고매체가 주는 환상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시각으로 마무리 된다.

- 요즘 시대 예술관람이라 함은 나의 수준과 교양을 척도하는 듯한 일종의 지적권력 마냥 평가되고 있다.

초등학교에선 매번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을 의무적으로 채워넣고 있고, 예전에 비해 부모 세대들 역시 이런 문화활동이 아이의 정서적 발달에 도움이 된다....라고 생각하며 행하지만, 본인이 미술관 가서 보면 흥미없는 애들이 더 많던데.ㅋㅋㅋㅋ 그 옆에서 그림에 대해 세세히 설명해 준다고 아이 귀에 얼마나 들어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한들 사람들은 그래도, 그렇게라도 하면 내 아이, 혹은 내 자신의 문화적 소양이 오름과 동시에 자신이 평가 역시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냥 편한 맘으로 보면 안되는 건가.... 그러면서 막상 실생활에서 예술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지.

어차피 사람들의 기준이라 함은 소더비 같은 곳에서 얼마에 낙찰된 작품인가가 더 평가의 척도가 되니 말이다.

(물론 순수하게 혹은 여가 생활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도 있겠지. 여기서 말하는 건 그 '당연함' 이 아니므로 그런 반론은 받지 않겠다.ㅋㅋㅋㅋㅋ)

여기서 중요 포인트. '얼마에 낙찰된 작품인가'

- 존 버거는 기존에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을 틀어서 '순수 미술'을 '순수하지만은 않게' 바라보며 다른 방법, 방식을 제시한다.

중세시대 미술은 대표적으로 '유화'를 꼽는다. 많은 귀족들과 왕족이 유화 작품을 사들이고 자신의 저택과 왕궁을 '치장' 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유화 작품은 도슨트의 설명을 통한 오롯이 작품에 대한 설명뿐이다. 그림의 연도, 방식, 작가의 경력, 시대 상황 정도. 그러나 존 버거는 그 방식에서 다르게 생각해보자 한다.

중세 돈 많은 작자들이 과연 '감상'만을 위해 그림을 소장했을까. 예상하듯이 아니다. 당시 그들에게 그림이란 권력과 명예 혹은 자기 과시를 위한 수단이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미술관에 수많은 그림들, 소더비에 매년 나오는 그 작품들이 모두 저들의 사치와 권력욕으로 인해 다행스럽게도 파손되지 않고 남겨져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그림의 가치는 결국 시장가격에 의해 형성된다.

시장가격이란, 액수 뿐 아니라 소장한 자는 누구이며, 어떤 가문인지도 매우 중요하게 매겨진다.

반 고희의 작품들을 보자. 그의 가치가 높아진 계기가 작품이 아름다워서 뿐일까. 그의 작품 감상에는 돈을 매길 수 없고, 각자의 감성이 존재하지만, 그의 작품을 세상이 높게 평가해 줄 수 있는 건 작품의 '시장가격'인 것이다.

- 존 버거는 미술과 광고매체 속에 등장하는 '여성' 의 이미지와 인식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요즘에 들어서야 논란이 되고 있는 사회 미디어 속 관념- 특히 통상적 관념에서 보여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통상적 관념이란, '여자는 이래야지' 같은 의미랄까. 여성다움을 강조하는데, 그 여성다움이 과연 우리가 원한 건지 아니면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진 허울인지 를 생각해 보게 한다.

과거 작품들을 보면 여성의 누드화는 매우 흔한 패턴 중 하나이다. 넘나 많지. 내가 본 유일한 남성 누드화는 르누와르의 '소년과 고양이' 라는 작품으로 그 외는 신화나 전쟁 속의 이미지 뿐이다.

르누아르 - 소년과 고양이

(파리 오르쉐 미술관에 있는데 작았던 걸로 기억. 진품은 아니었던 듯. 나는 국내 전시회때 본 기억이 있는데 진품인지는 모르겠고, 크기는 원본과 똑같았음. 실물로 보면 아름다움이 생생함. 그리고 기존 르누아르가 선택해 온 따뜻하고 밝은 색채에서 벗어난 차갑고 우아한 색채감이 인상깊은 작품.)

- 현대 광고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은 주로 '성'을 매개로 '누군가'를 위해 보여지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 '누군가'는 당연 남성들이다. 여성을 위한 제품조차, 그 제품을 누구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부각된다. 남성중심의 매체들이 그 동안 여성들 스스스로에게 조차 일종의 '코르셋'을 지우게 했는지 생각할 부분들이 많았다.

 

"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중략)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를 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

 

 

- 여성들이 '꾸미는' 것에 대하여 요즘 세상은 많은 토론들이 이어지고 있다. 꾸밈이란 것이 어느 정도 사회통념(회사나 격식이 필요한 자리)이 허용되는 곳을 제외하고 오직 내가 원해서, 하고 싶어서 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한테 화장하지 않고 일명 여성스런 옷을 입지 않았다 하여 비꼬거나 질타를 보내는 것은 '차별' 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매체를 통해 여성을 시각화 하고 현실에게 그들에게 시각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는가.

 

 

"화가가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의 손에 거울을 쥐어 주고 그림 제목을 '허영'이라고 붙임으로써,

사실상 자신의 즐거움 때문에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 놓고는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방송과 소셜을 통해 여성들을 비난한다. 여성들이 그동안 주로 남성들의 폭력에 비난에 왔다면 남성들은 주로 여성들의 '외모' 와 '허영'에 대해 비난해 왔다. 이는 쉽게 육아에 힘든 여성을 아이를 돌보지 않는 여자로 둔갑시키거나 값비싼 화장품에 돈을 쓰는 여성들을 된장녀니 김치녀라며 비하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요즘 여성들이 남성의 외모와 허세에 대해 떠든다 한들 남성들이 억울해할 게 무언가.

 

​"즉 그림을 보는 남자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다.(중략) 유럽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여인의 몸에 음모를 그려 넣지 않는 관습 역시 동일한 목적에서이다.(중략) 여인의 성적 욕망은 최소화 되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그림을 보는 남자는 성적 욕망이 남자만의 전유물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존 버거는 더 나아가 '광고' 가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자유' 의 모순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우리는 좋은 집이나 자동차, 의류 광고를 보며 그 속에 '나'를 집어 넣는다.
내가 저 집에 살면. 저 자동차가 내것이라면? 광고는 마치 그 모든것이 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한 마디로 당신이 조금만 '돈'을 들인다면 이 광고 속 이미지는 '내 자신' 이 될 수도 있다고 '유혹'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행' 이라는 단어에는 참 많은 것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 사회적 이슈가 아닌, 너도나도 '따라하는' 것이 결국엔 '자기만족' 을 위한 것인데. 과연 그 자기 만족이 순수하게 스스로 원한 것이 맞느냐 하는 것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남들 하거 보니 좋아보여서, 광고 속 연예인을 따라하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누군가 나를 보고 그 연예인을 상상해주길, 마치 내가 그 연예인이 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한때이기도 하고, 개중엔 진정 내가 필요해서 따라하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고 그것이 내 기분을 좋게 한다면 범죄도 아니고 내 쾌락을 위해 소비하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광고의 기능이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고 소비한다면 좀 더 현명한 생활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중략)그들이 팔고자 하는 상품이나 기회에 의해 자신이 매력적인 인물이 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중략)무엇이 그들을 남들의 선망의 대상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가.

그건 바로 다른 사람들의 선망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glamour)인 것이다."

 

 

- 우리는 '누군가' 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 광고는 그 점을 노리고 있다. 선망의 대상이란 무엇인가.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 비싼 옷과 화려한 조명 아래 아리따운 외모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모습은 그들이 하는 행동이 곧 권력이 된다. 우리는 재벌들을 욕하지만, 그 재벌 계층이 사용하는 '물건' 들에 대해선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곤 한다. 삼성 이재용이 박근혜 국정농단으로 청문회에 나와 립밥을 잠깐 바르는 모습하나로 그가 사용했던 립제품이 품절되는 것만 봐도 이해되지 않는가.

선망의 대상이란 건 권력의 환영, 환상과도 같다는 생각이다. 광고는 그 환상을 보여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우리는 광고 제품을 통해 그 환상이 실현 될 것이라 상상한다. 하지만 내 주머니에서 돈만 나갈 뿐인란 걸 현명한 소비를 위해 어느정도는 기억해 두자 ㅋㅋㅋㅋ

 

 

"광고는 '만일 당신이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될 수 없다'라는

두려움을 유발시키고 이를 이용한다."

 

 

-광고는 미래 시제로 얘기하지만, 그 미래의 달성은 끊임없이 연기된다.(중략) 광고의 진실성이란 광고가 내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는가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가 주는 환상이 그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품는 환상에 얼마나 적절하게 들어맞느냐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광고는 '나쁜 것' 이란 인식이 생길 수도 있으나, 모든 기능에는 순기능이란 것도 있다. 광고를 통해 세계의 이슈를 연결하기도 하고, 공익 목적 역시 광고를 통해 이루어 질 수 있음은 사실이다. 광고 역시 그 나름대로 '철학적 세계' 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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